"설마 그럴 리 없잖아"가 소송이 되는 순간

사람들은 계약서를 쓸 때 묘한 불안을 느낀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와 동업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감정을 느낀다. 서로 믿는 사이에 계약서 조항을 따지는 것이 마치 상대를 의심하는 행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계약서를 대충 쓰거나, 아예 쓰지 않거나, 혹은 인터넷에서 찾은 양식을 그대로 복붙한다. 괜히 깐깐하게 보였다가 계약이 어그러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몇 가지 걸리는 사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약서에 서명을 한다. 그리고 나중에 내 사무실 문을 두드린다.
나는 변호사다. 매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들은 놀랍도록 비슷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설마 그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어요."
믿음은 감정에 불과하다.
한 의뢰인의 이야기를 해보자. 그는 20년 지기 친구와 함께 작은 식당을 차렸다. 서로 반반씩 투자했고, 각자의 역할도 구두로 정했다. 계약서는 없었다. 계약서를 굳이 왜 쓰냐고, 우리가 남도 아닌데. 3년 후 그 식당은 제법 잘 됐고, 그 순간부터 균열이 시작됐다. 돈이 생기자 각자의 기여도에 대한 기억이 달라졌다. 한 명은 자신이 더 많이 일했다고 했고, 다른 한 명은 사실 이것저것 따지면 자신이 돈을 더 많이 투자했다고 했다. 둘 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믿음은 감정에 불과하고, 믿음만 가지고 법정에 설 수 없다. 친구를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계약서를 써야 한다. 제대로. 그것은 불신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다.
계약서는 미래를 위한 것이다
계약서를 작성하는 이유는 미래를 위해서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합의한 내용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미래의 어느 날을 위해 적어두는 것이다. 사람의 기억은 놀랍도록 이기적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된다. 이것은 나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신경과학이 입증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법정에서는 기억이 아니라 문서가 말한다. "그때 분명히 그렇게 했잖아요"라는 말은 증거가 되지 않는다. 판사님은 당신의 억울함을 들어주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들어주지만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의 근거는 오직 입증된 사실뿐이다.
나는 종종 의뢰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계약서는 앞으로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보장해주는 문서가 아닙니다. 나중에 싸울 일이 생겼을 때 싸울 수 있는 무기를 미리 만들어두는 것입니다. 무기가 없으면 싸울 수조차 없어요.
빠진 조항 하나가 수천만 원을 날린다
계약서를 쓴다고 해서 다 같은 계약서가 아니다. 가장 흔한 실수는 '당연한 것은 쓰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이다. 부동산 임대차 계약을 예로 들면, 원상복구 범위를 명시하지 않아서 퇴거 시 수백만 원의 분쟁이 생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동업 계약에서 이익 분배 방식을 두루뭉술하게 쓰고 나중에 수익이 나자 각자의 해석이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 용역 계약에서 납품 기준이나 수정 횟수를 명시하지 않아서 끝도 없는 수정 요구에 시달리는 프리랜서들의 이야기는 매일같이 들린다.
꼼꼼한 계약서에는 반드시 들어가야 할 요소들이 있다. 당사자 정보와 계약 목적을 명확히 하고, 금액·기간·조건 등 핵심 사항을 구체적 숫자로 기재해야 한다. 불이행 시 책임과 손해배상 방식도 미리 정해둬야 하며, 분쟁 발생 시 관할 법원과 해결 방법도 명시해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계약 해지 조건과 절차까지 써두면 나중에 출구 전략을 놓고 다툴 일이 없다. 이 항목 중 하나라도 빠지면, 그 빈 공간은 나중에 분쟁의 씨앗이 된다.
"그땐 몰랐어요"라는 말의 무게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법정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어떤 것일까. 폭력적인 분쟁도, 극적인 증거 제출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가장 슬픈 장면은, 당사자가 "그땐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진심으로 억울해하면서도,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그 표정.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준비가 없었을 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계약서를 써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예상해서가 아니라, 좋은 관계를 나쁜 기억으로 끝내지 않기 위해서다. 계약서는 관계를 차갑게 만드는 문서가 아니다. 오히려 관계를 오래,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집에 소화기를 두는 것이 불이 날 것을 예감해서가 아닌 것처럼.
변호사 검토, 선택이 아닌 보험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계약서 검토를 변호사에게 맡기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내가 봐온 사례들에서, 계약서 검토 비용은 소송 비용의 수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예방 한 번이 치료 열 번보다 싸다는 말은 의료에서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계약을 앞두고 있다면, 한 번쯤 전문가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것을 권한다. 당신이 쓴 문장이 법적으로 어떻게 읽히는지, 빠진 조항은 없는지, 나중에 분쟁이 생겼을 때 이 계약서가 당신 편이 되어줄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것. 그것이 준비된 사람의 방식이다.
인생에서 확실한 것은 많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계약서를 쓴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지금 이 순간의 합의를 단단히 새겨두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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