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상담

NDA 계약서보다 먼저 봐야 할 것은 바로

지세훈_변호사 2026. 5. 4. 12:06

 

나는 계약서를 많이 본다.

직업이 그렇다. 이혼 사건을 맡으면 재산분할 합의서를 보고, 사업 분쟁을 맡으면 동업계약서를 본다. 기밀유지계약서, 즉 NDA(Non-Disclosure Agreement)도 꽤 자주 마주친다. 그리고 매번 같은 장면을 목격한다. 계약서를 손에 쥔 사람이 그것이 마치 방패라도 되는 양, 혹은 상대방의 입을 꿰매는 실이라도 되는 양 안도하는 장면.

나는 그 안도가 불편하다.

NDA란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이렇다. '당신이 알게 된 정보를 밖에 흘리면 법적 책임을 진다'는 약속. 기업이 투자자에게, 스타트업이 개발자에게, 때로는 연예인이 매니저에게, 혹은 어떤 관계에서든 비밀이 오가는 자리에 이 종이가 등장한다. 서명란에 도장 하나 찍으면 뭔가 단단히 묶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다.

그 사람이 정말로 비밀을 지키고 싶다면, NDA가 필요했을까?

물이 이미 엎질러진 뒤에 계약서를 꺼내드는 경우를 나는 수없이 봤다. 기밀 정보는 이미 경쟁사로 넘어갔고, 사적인 대화는 이미 스크린샷으로 저장되어 있고, 내부 전략은 이미 누군가의 머릿속에 이식되어 있다. 그 순간에 NDA 위반을 주장해봐야 할 수 있는 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다. 시간과 비용을 소모하고, 운이 좋으면 얼마간의 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새 나간 정보는 돌아오지 않는다.

정보라는 건 원래 그렇다. 한번 복제된 것은 회수되지 않는다. 한번 말해진 것은 말해지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계약서는 사후에 책임을 묻는 도구이지, 사전에 배신을 막는 장치가 아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자꾸 잊는다.

왜 잊는 걸까. 아마도 계약서가 주는 심리적 안정감 때문일 것이다. 서명이 완료된 문서를 보고 있으면 우리는 뭔가 처리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위험을 관리했다는 착각. 변수를 통제했다는 환상. 그리고 그 환상 속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건너뛴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오래 사람을 보는 직업을 해오면서 한 가지를 배웠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계약서 없이도 비밀을 지킨다. 그리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계약서가 있어도 방법을 찾는다. 법적 책임을 피할 방법이 아니라 — 물론 그것도 찾지만 —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이야기를 먼저 만든다.

"그 사람이 먼저 나를 배신했다." "이건 공익을 위한 일이다." "어차피 다 알게 될 내용이었다."

NDA를 위반한 사람치고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들은 항상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사전에 서명된 어떤 계약서도 봉쇄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계약서보다 사람을 먼저 본다.

이 사람은 과거에 어떻게 행동해왔는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가. 이해관계가 충돌했을 때 어떤 선택을 했는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원칙을 지킨 경험이 있는가. 그 사람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이런 것들은 계약서에 적히지 않는다. 실사(due diligence)라는 이름으로 일부 파악할 수 있지만, 결국 사람을 직접 보고 대화하고 느끼는 과정 없이는 온전히 알 수 없다. 번거롭고,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틀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NDA 한 장보다 훨씬 더 당신의 비밀을 지켜준다.

계약서는 수단이다. 수단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우리는 본질을 잃는다.

법조인으로서 나는 이 말이 NDA를 무시하라는 뜻으로 읽힐까 봐 잠깐 멈춘다. 그건 내 뜻이 아니다. NDA는 분명히 유효하고, 필요한 자리가 있다. 위반 시 손해배상의 근거가 되고, 상대방의 의지를 명문화하는 의식적 효과도 있다. 서명이라는 행위 자체가 심리적 구속력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고 믿는다면, 그건 위험한 과신이다.

나는 계약서 검토를 의뢰받을 때 종종 묻는다. "상대방을 얼마나 아세요?" 그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당황한다. 계약서를 검토해달라고 왔는데 사람 이야기를 하느냐고. 그런데 나는 진심으로 묻는 것이다. 계약서는 내가 다듬어드릴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내가 대신 봐드릴 수 없다.

가끔 생각한다. 우리가 계약서에 집착하는 건, 어쩌면 사람을 믿는 일이 너무 무서워서가 아닐까. 배신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아픔이 두려워서, 법적 언어로 된 벽을 세우는 것이 아닐까. 그 벽이 완전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믿는다는 건 원래 취약한 행위다. 근거 없이 상대방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다. 그리고 그 취약함 없이는, 어떤 협력도, 어떤 관계도 시작되지 않는다.

계약서는 그 취약함을 대체하지 못한다. 다만 그 취약함을 조금 더 감당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다.

도구를 믿지 말고. 사람을 보라.

그것이 내가 수많은 계약서를 검토하면서 배운, 계약서 밖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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