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여금 반환청구 소송에서 피고가 가장 곤란해하는 순간 중 하나는 원고가 차용증을 증거로 제출했을 때입니다. 분명히 돈을 빌린 기억은 있지만 금액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돈을 빌린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작성한 문서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간혹 차용증에 기재된 자신의 서명이나 도장까지 부인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고가 제출한 차용증을 인정하면 곧바로 패소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차용증의 진정성립을 부인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제가 대여금 사건을 검토하면서 확인하는 것은 차용증에 적힌 내용이 마음에 드는지가 아니라 실제로 누가 그 문서를 작성했는지입니다. 자신의 서명이 맞고 자신이 직접 도장을 찍었다면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물론 차용증이 진정하게 작성되었다고 해서 원고의 대여금 청구가 반드시 전부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실제로 지급되었는지, 차용증에 기재된 금액이 정확한지, 이미 변제한 금액은 없는지 등은 별도로 다툴 수 있습니다. 문서의 성립을 인정하는 것과 원고의 청구를 인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이 구별을 하지 못한 채 무조건 서명부터 부인하는 것은 피고에게 유리한 대응이 아니라 오히려 불필요한 위험을 만드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민사소송법 제357조는 사문서의 진정성립을 증명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제358조는 본인 또는 대리인의 서명이나 날인 또는 무인이 있는 사문서는 진정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정성립이란 문서가 작성명의인의 의사에 따라 작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대법원은 문서에 찍힌 인영이 작성명의인의 인장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인정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본인의 의사에 따른 날인으로 추정하고, 나아가 문서 전체의 진정성립도 추정한다는 입장입니다. 이른바 사문서 진정성립의 추정에 관한 법리입니다. 따라서 차용증에 사용된 도장이 피고의 도장이라는 사실이 인정되면 피고는 단순히 자신이 찍은 기억이 없다는 주장만으로 이러한 추정을 쉽게 뒤집기 어렵습니다. 본인이 직접 서명한 사실을 인정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법원 2003. 4. 11. 선고 2001다11406 판결은 작성명의인이 서명이나 날인을 한 사실을 인정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문서 전체가 완성된 상태에서 작성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처럼 차용증의 진정성립은 문서에 기재된 형식적인 문구만으로 판단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서명과 날인의 진위, 작성 경위, 문서의 완성 시점 등을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특히 피고가 서명이나 도장을 실제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차용증 전체가 위조되었다고 주장하려면 그 추정을 뒤집을 만한 구체적인 사정과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차용증의 서명이나 도장이 실제로 본인의 것이 아닌 경우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이때는 답변서에서 해당 문서의 진정성립을 명확하게 다투어야 합니다. 예컨대 원고가 제출한 갑 제1호증 차용증의 서명은 피고가 작성한 것이 아니며, 해당 문서의 작성에 동의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작성권한을 부여한 사실도 없다는 취지로 주장할 수 있습니다. 도장 역시 피고가 사용한 인장과 다르거나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날인되었다면 그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재해야 합니다. 단순히 위조된 문서이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적는 것보다 왜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작성된 문서가 아닌지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소 사용하던 서명이 남아 있는 다른 계약서, 금융기관 제출서류, 거래 당시의 문자메시지, 실제 사용하던 인장의 인영 등이 비교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원고가 차용증 사본만 제출했다면 원본의 존재와 상태를 확인할 필요도 있습니다. 민사소송법 제359조는 필적이나 인영의 대조에 의한 증명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필요에 따라 문서감정도 검토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감정은 무조건 신청한다고 유리한 결과가 나오는 절차가 아닙니다. 원본 확보 가능성, 비교자료의 신뢰성, 감정 결과가 사건의 핵심 쟁점에 미치는 영향 등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답변서에는 문서의 성립을 부인한다는 결론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사실관계를 가능한 범위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편이 바람직합니다.
문제는 실제 대여금 사건에서 피고가 뒤늦게 부인하려는 서명이나 도장이 본인의 것인 경우도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소송을 당한 상황에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문서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송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주장이 듣기에 유리한지가 아니라 그 주장을 증명할 수 있는지입니다. 자신이 직접 서명한 사실을 알면서도 필적이 다르다고 주장하거나 본인이 찍은 도장을 타인이 위조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원본을 제출하고 다른 문서와 필적이나 인영을 대조하면 주장의 신빙성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민사소송법 제363조는 당사자나 대리인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진실에 어긋나게 문서의 진정성립을 다툰 경우 200만 원 이하의 과태료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문서의 진정성립을 다투었다가 결과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이러한 제재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충분한 근거 없이 진실에 반하는 주장을 의도적으로 하는 경우입니다. 제가 피고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명확합니다. 본인이 작성한 차용증이라면 애써 그것까지 부정하지 마십시오. 다툴 부분이 있다면 문서가 아니라 그 문서에 기재된 법률관계의 실질을 다투는 편이 낫습니다. 사실과 다른 방어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당장의 불안감을 덜어줄 수 있을지 몰라도 재판 전체의 신뢰성을 떨어뜨릴 위험이 있습니다.
차용증이 진정하게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피고가 다툴 수 있는 쟁점은 남아 있습니다. 가장 먼저 확인할 것은 실제 금전이 지급되었는지입니다. 차용증에 5,000만 원이라고 기재되어 있더라도 실제로 지급된 금액이 얼마인지, 기존 거래관계를 정산하면서 작성한 문서인지, 원금과 이자를 합산한 금액인지에 따라 법률적 판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미 돈을 변제했다면 그 사실을 입증할 계좌이체 내역이나 영수증을 확보해야 합니다. 변제기가 도래하지 않았거나 채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항변이 가능한지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본인이 서명한 것은 맞지만 당시 일부 내용이 공란이었고 상대방이 나중에 임의로 금액이나 변제기를 기재했다면 이는 별도로 다투어야 할 문제입니다. 다만 백지 상태에서 서명했다는 주장만으로 문서의 효력을 쉽게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완성된 문서에 서명했다는 추정을 뒤집을 합리적인 이유와 증거가 필요하며, 실제로 미완성 문서가 사후 보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 보충권한이 있었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이러한 사안에서는 서명 자체를 무조건 부인하는 것보다 서명 당시 문서의 상태와 상대방에게 부여한 권한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차용증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모든 방어를 포기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차용증을 부정해야만 소송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습니다. 인정할 사실과 다툴 사실을 구분해야 합니다.
반대로 차용증이 실제로 위조된 것이라면 대응의 방향은 달라집니다. 피고가 차용증을 작성한 사실이 전혀 없고, 원고 또는 제3자가 피고 명의의 서명을 모방하거나 권한 없이 도장을 사용하여 문서를 만들었다는 구체적인 사정이 있다면 사문서위조 및 위조사문서행사 등 형사책임을 검토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 저는 단순히 민사소송 답변서에서 차용증의 성립을 부인하는 데 그치지 말고 형사고소를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상대방이 문서를 위조했다면 그 사실은 대여금 청구의 정당성과 직접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위조라는 확신만으로 곧바로 고소장을 제출하기보다는 문서의 작성 경위, 실제 서명과 인장의 사용 여부, 상대방이 문서를 취득한 경위 등을 확인해야 합니다. 형사고소는 민사소송에서 유리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협상수단이 아닙니다. 실제 범죄 혐의가 존재할 때 그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구하는 절차입니다. 허위라는 사실을 알면서 상대방을 형사처벌받게 할 목적으로 고소하면 오히려 무고죄가 문제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형사고소를 했다고 해서 민사소송이 자동으로 중단되거나 원고의 청구가 배척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장부본을 송달받았다면 원칙적으로 30일 이내에 답변서를 제출해야 하므로 형사고소와 민사소송 대응은 별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실제 위조가 의심된다면 증거를 확보하여 신속하게 고소를 검토하되, 민사재판에서도 독립적으로 문서의 진정성립을 다투어야 합니다.
결국 차용증의 진정성립이 문제 되는 대여금 소송 답변서는 사실관계를 얼마나 정확하게 구분했는지에 따라 설득력이 달라집니다. 먼저 청구취지에 대한 답변에서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해 달라는 취지를 밝히고, 청구원인에 대한 답변에서는 어떤 사실을 인정하고 어떤 사실을 다투는지 구체적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원고가 제출한 차용증의 서명이나 날인이 본인 것이 아니라면 그 진정성립을 부인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정을 제시해야 합니다. 본인이 서명한 문서가 맞다면 불필요하게 성립을 부인하지 말고 실제 대여금 지급 여부, 원금의 액수, 변제 여부, 이자 약정, 변제기 등 실질적인 쟁점을 검토해야 합니다. 일부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면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섣불리 인정하거나 단정적으로 부인하지 않고 추가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 위조된 문서가 소송에 제출되었다면 형사고소도 검토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민사상 방어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송에서는 모든 주장을 부인하는 사람이 반드시 유리한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고 핵심 쟁점에 집중하는 사람이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차용증에 자신의 서명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돈을 지급해야 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서명한 사실조차 부인하면서까지 소송을 방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진짜 위조라면 위조를 다투고 형사고소를 검토하십시오. 본인 서명이 맞다면 인정하고 다른 쟁점을 검토하십시오. 법원은 피고가 얼마나 많은 주장을 부인했는지가 아니라 어떤 주장이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는지를 판단합니다. 대여금 소송에서 피고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부인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방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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